
정운의 전시《뭉개진 자리》는 지워진 것에 관한 전시가 아니라, 지워짐 이후에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형상과 감각에 관한 전시다. 작가는 아현동 재개발 지역의 골목에서 철거마대가 바람에 따라 펄럭이며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장면, 그리고 그 표면 위에 남겨졌으되 검은 필치에 의해 무디게 짓눌리고 덮인 문장들을 목격한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고,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도 끝내 복원할 수 없는 그 글귀들은 의미를 잃은 폐허의 텍스트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운이 응시하는 것은 상실된 원문 자체가 아니다. 그의 시선은 오히려 의미가 지워진 뒤에도 감각적 압력으로 남아 있는 표면의 상태, 곧 얼룩과 주름, 팽창과 수축, 덮임과 새어 나옴의 운동에 머문다.
정운의 작업에서 ‘뭉개기’는 단순한 삭제나 파괴의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형상을 완전히 없애지 않은 채, 그것이 특정한 기능과 의미로 고정되는 순간을 유예시키는 조형적 전략에 가깝다. 문자라면 더 이상 명료한 언어로 읽히지 않게 만들고, 사물이라면 그것이 본래 수행하던 기능적 정체성을 흐리되 완전히 다른 것으로 치환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소거의 미학이기보다 머뭇거림의 미학이라 해야 한다.
이러한 조형 전략은 기호의 작동 방식에 대한 섬세한 문제제기로도 읽힌다. 소취르 이후의 구조주의 언어학이 보여주듯 언어는 기표와 기의의 결합 위에서 의미를 형성하지만, 정운의 작업에서 이 결합은 더 이상 안정적이지 않다. 문자와 흔적은 정보를 매개하는 표식이라기보다 하나의 물질적 사건으로 되돌아가간다. 그러나 이때 의미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직접적 지시 기능이 약화될수록 의미는 단일한 방향으로 수렴하지 않고 복수의 가능성으로 열리게 된다.
작가가 남긴 “납작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다. 원근법의 혼란이 일어난다. 세계가 납작했다가 부풀어 오른다”라는 문장은 그의 조형세계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핵심 진술이다. 여기에는 단지 재료 선택의 문제나 시각적 취향이 아니라, 세계를 조직하고 지각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사유가 내포되어 있다. 정운의 작업에서 세계는 더 이상 안정된 깊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납작한 재료는 표면에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팽창과 수축의 잠재력을 품고 있으며, 철거마대는 한순간 납작한 폐기물처럼 보이다가도 바람과 공기를 머금으며 부풀어 오른다.
이 지점에서 정운의 작업은 흐려짐을 통해 역설적으로 어떤 원형적 상태에 접근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철거마대가 폐기와 운반의 실용적 도구라는 동일성을 벗고 팽창과 수축, 억압과 분출, 봉인과 호흡이라는 상상적 리듬의 형상으로 변환시킨다. 사다리는 상승과 이동의 기능을 잃음으로써 오히려 경로 자체의 불안과 욕망을 드러내고, 입구와 출구를 상실한 원환 구조는 통과나 도달의 가능성보다 맴돎과 봉쇄의 감각을 환기한다.
전시장에 놓인 설치들은 이러한 방법론을 공간적으로 정교하게 실현한다. 특히 매달린 포대나 용기 그 자체보다 그것이 벽면에 남기는 음영이 더 강하게 지각되는 순간, 작품은 사물의 물리적 현전보다 그것이 야기하는 감각적 파장을 전면에 내세운다. 그림자는 대상의 부차적 부산물이 아니라 대상의 존재를 증폭하고 변형하는 또 하나의 조형 층위가 된다.
정운의 작업을 더욱 주의 깊게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그가 ‘모호함’을 단지 형식적 효과로 소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의 작업 안에서 대상들은 더 이상 자신의 용도를 중심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기능을 잃어버린 바로 그 순간부터 더 많은 것을 말하기 시작한다. 이때 사물은 실용적 질서의 하위 항목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명명되지 않은 감각적 사건으로 떠오른다.
정운이 포착하는 것은 이러한 중간 상태의 존재론이다. 그것은 완성된 형상의 미학이 아니라 이행 중인 형상의 미학이며, 결과의 미학이 아니라 변이의 미학이다. 그는 서사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설명을 제공하지 않으며, 감정적 호소를 전면화하지도 않는다. 대신 얼룩, 주름, 그림자, 부풀음, 눌림, 흐름 같은 물질적 상태들을 전면화함으로써 재개발이라는 사건이 남기는 정동적 구조를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호출한다.
《뭉개진 자리》는 기억을 재현하는 전시라기보다,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을 조형적으로 실험하는 전시에 가깝다. 정운의 작업노트에 등장하는 골목의 냄새, 반지하로 내려가는 동선, 물이 샐 것 같은 작은 부엌의 상상, 낮고 습한 검은 방의 울림은 모두 기억의 이러한 비개념적 층위와 깊이 맞닿아 있다. 정운은 이 불완전성을 상실로만 보지 않고, 오히려 미학적 가능성의 원천으로 전환한다.
관객의 역할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작품은 관객에게 곧장 의미를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지각의 개입을 요구하고, 관객은 그 지연 속에서 자신의 인식 습관을 의심하게 된다. 이때 미학적 경험은 대상의 아름다움이나 독창성을 판정하는 차원을 넘어, 세계를 지각하는 자신의 방식이 흔들리는 경험으로 확장된다.
정운의 조형은 곧 사유의 방식이며, 사유는 다시 물질의 상태로 환원된다. 얼룩은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덧붙여진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사유이고, 부풀었다 꺼지는 포대는 어떤 상징의 예시가 아니라 그 운동 자체로 이미 의미의 발생 구조를 내장한다. 이 전시 앞에서 우리는 칸트와 헤겔, 소쉬르와 뒤랑을 호출할 수 있지만, 그것은 작품이 이론에 종속되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이 이론적 사유를 다시 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결국 《뭉개진 자리》는 무너짐의 기록이 아니라, 무너짐 이후에도 남는 감각의 구조에 대한 탐구다. 그것은 폐허를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라, 폐허 이후 세계가 어떤 표면과 리듬, 어떤 그림자와 울림으로 우리 앞에 남게 되는지를 묻는 전시다. 정운은 사물이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자리, 문장이 더 이상 읽히지 않게 된 자리에서 오히려 예술이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문화공간 정향재 디렉터 최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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